꽃잎처럼 스러져간 그날의 이름 — 『소년이 온다』를 읽고
『소년이 온다』. 이 짧은 문장은 마치 누군가의 울음처럼, 조용히 그러나 강하게 가슴을 파고든다. 한강 작가가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배경으로 써낸 이 소설은 단지 한 시대의 비극을 그린 작품이 아니다. 그것은 죽음을 목도한 자들이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오랫동안 침묵 속에서 버텨야 했는지를, 그리고 그 침묵 끝에서 마침내 어떻게 말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존엄과 기억의 서사’다.
책의 표지에는 검은 배경 위로 흰 안개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작고 연약한 꽃들이지만, 그 군락은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마치 무명으로 쓰러져간 수많은 생명들을 상징하듯, 그들은 말없이 우리를 응시한다. 그리고 중앙에 자리한 주황빛 타이틀은, 어둠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저항의 불빛처럼 우리의 시선을 붙잡는다. "소년이 온다"는 선언은, 단순한 시작이 아니라 누군가의 증언, 혹은 회귀다.
이 소설은 한 소년의 죽음을 중심으로, 그를 기억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통해 이야기를 전개한다. 주인공 '동호'는 열다섯 살. 너무 어린 나이에 죽음을 맞이한 그는, 이야기가 시작되자마자 독자에게 강렬하게 다가온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이 소설은 '죽은 자의 시선'을 빌려 살아남은 자들의 고통을 그린다. 죽은 소년이 살아 있는 자들을 바라보는 구조는, 독자로 하여금 삶과 죽음의 경계를 무너뜨리게 한다. 우리는 죽은 자의 목소리로, 살아 있는 자의 고통을 듣는다.
한강은 이 소설에서 단 한 순간도 폭력을 미화하거나 희생을 드라마틱하게 포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는 고통의 잔혹한 디테일을 피하지 않고 직면하게 만든다. 장례식장에서 시신을 닦는 묘사, 무자비한 총탄 소리, 시체와 시체 사이에서 생존한 자들이 겪는 정신적 외상... 이 모든 것이 차분하고 절제된 문장으로 이어지며, 독자는 도망칠 수 없는 감정의 심연 속으로 끌려들어간다.
이 작품은 동시에 '기억의 윤리'를 묻는다. 진실을 말하지 못하고 살아남은 자들, 침묵으로 일관하며 자신을 지켜야 했던 사람들, 그리고 시간이 지나 그 모든 것을 잊은 채 살아가는 우리에게 작가는 묻는다. “우리는 그날을 정말 기억하고 있는가?” 소설 속 인물들은 그 기억으로 인해 부서지지만, 역설적으로 그 기억이 그들을 사람으로 남게 만든다.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죽은 자들의 이름을 부르며 살아가는 것 — 그것이 곧 인간의 존엄임을 한강은 조용히 일러준다.
읽는 내내 가슴이 무겁고, 눈물이 맺히는 장면이 많다. 하지만 『소년이 온다』는 비탄만을 남기지 않는다. 그것은 아픔 속에서도 연대를 보여주고, 죽음 속에서도 생의 흔적을 되살린다. 이 소설이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비극의 반복을 막기 위해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그 이름들’이다. 동호, 정대, 은숙, 그리고 말 없이 사라진 모든 존재들.
『소년이 온다』는 우리에게 말한다. 그날 그곳에 있었던 소년은 아직도 우리에게 오고 있다고. 잊히지 않으려 애쓰며, 이름 없는 무덤을 벗어나 말을 걸고 있다고. 그렇기에 우리는 오늘도 이 책을 읽어야 한다. 그리고 조용히, 그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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